오랫동안 순천에서 활동을 하였기에 염금향님이 광양인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32년 광양에서 태어나 소리공부를 위해 남원으로 건너가 이기중, 성우향, 박춘성, 임준옥, 강도근과 언니인 염해선 명창에게 판소리 사사한 후, 지난 1977년 순천으로 이주하여 작고하실 때까지 순천에서 국악학원 운영하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염원했던 바와 같이 북채를 놓지 않았다.

우리의 소리에 매료돼 이팔청춘 16살 꽃 다운 나이에 입문하여 70을 넘기고 죽는 순간까지도 소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당(花堂) 염금향님. 얼마나 소리 사랑이 강했던지 자신의 딸(정유진,(사)판소리보존연구회 순천지부장)은 물론 손녀(조정희 명창)까지 3대를 이어 직접 소리지도를 하여 그 맥을 잇게 하였다.

보통 판소리 분야에서는 대통령상이 들어있는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해야 명창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님이 배출한 문하생은 주순자, 박복희, 염경애, 김선희, 조정희, 허승희, 김현주, 양맹희, 박동진, 김명숙, 박영수, 박성호, 정유정, 김양남 등 판소리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제자들 가운데 소위 말하는 명창이 부지기수인데, 이는 대한민국 판소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판소리 거목인데 국악계에 부고가 별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출중한 실력을 지녔음에도 끝내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작고하신 점도 가슴이 아픕니다.”는 국악음반박물관장의 얘기와 같이 님은 명예나 부(富)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그저 소리사랑으로 평생을 살았다.

님이 떠난 지 1년.
모르긴 해도 어쩌면 하늘나라에서도 한 손에 쥘부채를 들고 태평가를 부르거나 아니면 북채를 쥐고 고수장단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떤 자리든 마다하지 않고 우리 가락을 전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던 님의 소리사랑 때문이다.

이제 우리 소리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님을 보낸 지 1주기를 맞으면서 지난 2002년 화당 염금향님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며 님의 소리사랑을 되새겨본다. 

소리에 대한 끝없는 갈증
1932년 6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광양에서 태어난 염금향님은 광양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2년 먼저 소리공부를 하던 언니 염해선 명창으로 인하여 평생의 업인 소리꾼의 길에 들어섰다.

천부적으로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데다 당시 서울을 제외한 지방 소리계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던 순천의 시대적 위치는 염금향님을 더욱 소리에 매료되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소리는 세월이 익혀주는 것 같아요.”“몸과 마음이 일구월심으로 정진해야 겨우 소리가 되지요”라는 염금향님은 심청가 한바탕을 ‘12년 걸려 겨우 마음에 차는 소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군중의 심금을 파고드는 참 소리를 향한 염금향님의 배움은 끝이 없다. 1970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인 임준옥 선생에게 수궁가와 흥보가를, 1980년에는 박춘성 선생으로부터 심청가를 사사하였으며, 1985년부터 15년간 성우향 선생에게서 춘향가와 심청가를 사사하는 등 염금향의 소리에 대한 갈증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전국을 돌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의 소리를 검증하기 위해 각종 대회에 참가한다. 1976년 5월 진남제의 제5회전국시조대회 을부에서, 이듬해인 1977년 4월에는 제4회지리산약수제 전국시조대회 을부에서 입상을 하고 5월에는 제3회한국방송공사전국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동편제와 서편제가 교차하여 만나는 순천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렇듯 ‘제’에 얽매이지 않는 염금향님의 소리는 오로지 사람의 폐부에 파고드는 소리여야 하기에 ‘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조상현 판소리 이수자가 되었다.

忍苦의 세월 30년
열여섯에 시작한 소리 인생이 60성상을 비껴섰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집안 내력인 녹내장으로 인하여 눈앞의 사물을 확연히 보지 못하고 어렴풋이 보는 가운데도 북채를 놓지 못한다. “과연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끔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자조 서린 의문을 가져본다. 서양 문물에 밀려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있던 지난 시간들의 사회적 편견으로 인하여 우리 것에 대한 천시 풍조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늘 벗어나지 못하는 빈곤의 늪은 소리꾼들로 하여금 소리판을 하나 둘 떠나게 만든다. 하지만 오히려 고난과 외로움을 재미로 돌리고 60여 성상을 인고의 멋으로 승화하여 유장한 세월을 보낸 어쩔 수 없는 소리꾼 염금향님.

이런 와중에 자랑스럽고 소중한 소리의 맥을 잇고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0년을 넘었다. 배일동, 양명희, 박영수, 박성호, 박복희, 염경애, 김정기, 김명숙, 채금희, 장은선, 조정희, 이춘심 등 염금향에게 소리를 배운 제자들이 전국의 학교에서 국악단에서 기량을 자랑하며 순천의 소리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제자의 수는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지요”“그저 그들이 사회 각지에서 나름대로 훌륭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하고 제가 헛살지 않았구나 느낍니다”는 말처럼 오랜 시간 연마해야만 되는 판소리가 가지는 시간성을 감안하면 염금향님의 문하생 수는 가히 엄청날 수밖에 없다.

무릇 모든 교육의 길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넘침이 없는 것이 올바른 기초의 형성일 것이다. 염금향님은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눈물이 나도록 단단히 기초를 형성하게 한다. 그리고선 더 나은 소리의 완성을 위해 아끼는 제자들을 더 넓은 세상, 더 훌륭한 선생을 찾아 떠나보낸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를 다른 선생에게 보내는 일은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하여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서는 사재를 털고 때로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 구걸하다시피 하여 학비를 지원하는 염금향의 제자사랑은 유별나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이듯 이를 잊지 못하는 제자들은 사회 각지에서 활동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 친목을 도모하며 아직도 북채를 놓지 않고 후진향성에 힘쓰는 스승의 소리사랑 뜻을 기리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1996년 11월에는 염금향의 소리인생 50주년을 기념하여 44명의 제자들이 모여 굿판을 벌린다. 우리의 소리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특정 유파의 판소리만을 고집하지 않는 염금향님의 마음처럼 ‘김세종제 춘향가 연창과 강산제 심청가 연창에 이어 남도민요, 비나리, 단가 등과 육자백이 줄타기, 설장고와 사물놀이’ 등 서양문화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이름하여 ‘염금향 판소리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나눔의 마음
맛깔스런 우리의 소리에 끌려 소리판에 들어서 평생이지만 빠질수록 더한 애착이 가는 탓에 ‘아마 죽을 때도 북채를 잡고 죽을 것’이라 평소에도 스스럼 없이 말하는 염금향님의 소리사랑 마음은 굿판의 대소나 격식을 가리지 않는다. 은빛마을의 치매환자들에게나 경로당, 양로원,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에게서, 교회에서, 마을회관에서, 군부대에서 등 어디서나 판만 펼치면 출연비의 많고 적음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나눔의 장을 갖는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 국악인들로부터 국악인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우리 소리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언제든 달려가 소리판을 펼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제자이자 딸인 (사)판소리보존연구회 정유진 순천지부장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굿판의 신명은 출연자와 관중이 한데 어우러져야 완성된다’‘절로 어깨춤을 추는 관중들에게서 창자의 소리는 완성된다’는 신념, 아니 그것은 어쩌면 믿음이다.

‘시민들의 애정이 식은 탓은 시대적 원인도 있지만 국악인들이 자성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사)판소리보존회 정유진 순천지부장의 자성의 얘기와 1988년부터 눈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까지도 (사)판소리보존회순천지부 소리선생으로 북채를 놓지 않는 염금향님의 소리에 대한 애정으로 미래 부흥을 꿈꾸는 한국 전통문화의 기운을 느껴본다.